남의 일이라고 모른 체 할 수 있을까. 역사에 갇힌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정인이 사건, 장애인의 불편과 학대받는 동물 문제, 아프간과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누군가는 마음이 들끓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목소리를 내고 문제해결에 앞장선다. 비영리의 일들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런 헌신들이 있어 아동과 여성, 흑인들이 오늘의 당당한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아직도 세상은 불평등하고 소외된 문제는 너무 많다.
누구나 할 수 있어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에 책임을 지고 나서는 영웅들이 있다. 절망한 이들에게 하루 생명을 연장해주는 것도 귀하지만 그가 처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살아갈 환경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부분 오래 끈질기게 매달려야 해결될 일들이다. 하나의 작은 시도가 사회제도 변화까지 가려면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돈보다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라 큰 보상은 기대하지도 않지만 버티는 것은 중요하다. 중도 포기하지 않으려면 버팀목이 필요하다. 이 영웅들에게 기부는 마치 가뭄에 애타는 농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물줄기와도 같다. ‘작은 기부금에 담긴 함께 하는 마음’이 영웅의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가끔 소중한 기부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진다.
몇 해 전 동물 안락사와 잘못된 기부금 사용으로 언론에 등장한 한 동물단체가 최근 기부금품법 위반 의혹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또, 대선과 맞물려 시민단체의 불법 이익을 전액 환수한다는 한 후보의 공약에 시비가 엇갈린다. 당연한 주장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기부제도의 구조적 취약성을 아는 전문가들과 대다수의 성실한 공익 기부단체들은 이런 내용이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사고 치는 이들은 따로 있는데, 부끄러움은 더 투명하게 제대로 일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몫이다. ‘이번에는 뭐가 달라질까’ 기대도 해보지만 20년째 백앤포스만 반복하다 제자리다. 그런 중에 우리 사회에는 ‘기부 포비아’라는 신조어가 아예 자리 잡으면서 ‘기부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는 이들의 입장을 타당하게 만들어준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기 어렵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기부자를 무시하거나 기부제도의 맹점을 이용하는 몇몇 사람들이 건재한다는 것이다. 썩은 감자는 수시로 골라내어야 하는데 말이다. 실수였고, 목적이 선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그것도 한두번이다. 방법과 절차를 계속 무시하면 결국 탈이 난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건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또아리 트는 것은 막아야 한다. 반복되는 실수는 습관이고 관행이고 마인드다.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부끄러움을 아는 이라면 작은 실수일 때 바로 잡고 큰 문제에 이르지도 않는다. 문제를 반복한다는 것은 심각한 징후다. 이런 데도 잘잘못을 따지기 어려워 썩었는데도 오래 간다.
둘째, 책임지지 않는 제도권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하기 어려운 실효성도 없는 법제도를 20년이 넘도록 개선하지도 않고 선거철만 되면 투명성 운운하면서 기부문화를 활성화하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기부는 정당 논리와 무관하게 가치중립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는데 정치적 맥락에서 유리한 상황만 이용하려 한다.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는 이들도 문제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본질을 외면한 채 이용만 하는 정부와 국회의 방관이 더 문제다. 선한 마음으로 일하는 단체와 국민들의 마음을 포기하게 하고 시들게 한다.
우리 민족은 정(情)에 살고, 흥(興)에 빠지며, 한(恨)을 품고 산다. 나라가 필요로 할 때, 사회가 어려워질 때, 도와야 할 이들을 만날 때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손을 내민다. 우리나라의 기부가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고속성장한 것도 우리 국민의 훌륭한 정서적 토대 덕이다. 조금만 더 정성을 들여 기부 환경을 가꾸면 한층 더 발전된 기부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대선 이후 건강한 기부 생태계 조성을 위한 시의적절한 방안이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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